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담 후세인 (문단 편집) === 후세인의 2인자, [[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]] === [[파일: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.png]]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(Izzat Ibrahim al-Douri, 1942.7.1~2020.10.25) 후세인이 집권한 모든 기간 동안 이라크 혁명 지휘 위원회 부의장이자 이라크 부통령을 역임한 [[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]]는 후세인의 오른팔로 불렸던 인물이었는데, 초등 교육만 받고[* 알두리는 [[코란]] 외의 책은 읽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.] 얼음 장수로 살아오다 현지 고등학교 교원으로 일했으나, 아랍 민족주의에 감명을 받고 당시 비합법 정당이던 [[바트당]]에 가입해 1959년, 1962년에 투옥된 적이 있다. 1963년 2월 쿠데타에 참여한 알두리는 1963년 11월 쿠데타 미수 사건에 참여했다가 구금된 후 감옥에서 후세인을 만나 그때부터 친구로 있었고 1967년에 출옥한 후 1968년 쿠데타에 참여한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다. 알두리는 후세인의 2인자였던 만큼 후세인의 악행들에도 핵심적인 역햘을 했는데, 이라크가 이란과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했고,[* 특히 걸프 전쟁 때 사우디아라비아 침공은 알두리가 직접 지시한 거였다고 한다.] 안팔 캠페인 때에는 사린 가스 사용 지시를 내리고 쿠르드족 반란 유혈진압에도 참여했으며, 시아파 탄압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보니 1998년 11월 22일에는 시아파의 성지 [[카르발라]]를 방문했다가 암살당할 뻔했을 정도였다. 그러면서 알두리는 자신의 고향 출신 인사들을 당, 치안·정보기관, 군 간부에 앉혔고, 1995년에는 자신의 딸을 [[우다이 후세인]]과 결혼시켰다.[* 하지만 얼마 후에 이혼했다. 사실 우다이 후세인의 실체를 보면 이혼한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.] 후세인의 축출 이후에는 차 3대에 현금 3천만 달러를 채우고는 사담의 딸, 측근들과 함께 [[시리아]] [[다마스쿠스]]로 도망쳤고, 1000만 달러의 현상범이 되었으면서도 이라크 바트당 조직들을 재편성하고 구정권 잔당 세력들이 이끄는 반미 게릴라들을 지원했으며, 후세인이 처형된 2006년 12월 30일에는 구 바트당/구 이라크군 출신들을 규합해 반미 무장 조직인 낙쉬반디 교단군을 만들고 최고 지도자에 올랐고, 후세인의 처형 후인 2007년 1월 3일에는 이미 금지된 바트당의 최고 지도자에 오른다. [[ISIS]]의 활동 초창기에는 반시아파, 반이라크 정부 성향을 공유하던 ISIS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ISIS가 너무 극단적이고 사상적으로도 낙쉬반디 교단군과 대립했기에 얼마 안 가 ISIL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고,[* 2015년에 공개된 녹음 테이프에서 알두리는 '이슬람 국가와 [[이란]]은 아랍과 이라크의 적'이라고 말했다.] [[예멘 내전]]에서 [[사우디아라비아]]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고 한다. 2005년 이후로 여러 번이나 사망설이 도는 와중에도 간간이 연설 테이프와 녹화를 공개하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과시해오다가 2020년 10월 25일에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